제1장 귀인 ***1979년 여름 1 그러니까 그날 대낮, 외삼촌이 아진을 놓쳤을 때 바닷속이라는 것조차 알지 못했다. 아진은 놀랍도록 고르게 숨 쉬고 있었다. 두 눈은 떠졌고 두 팔과 발목은 부드럽게 회전했다. 강렬한 햇빛이 번쩍하고 나타났다가 순식간에 사라지자, 맑은 쪽빛 유리병의 실루엣이 눈에 들어왔다. 투명한 물결의 그물망과 한 몸인 듯 가볍게 출렁였다. 아진은 유리병을 향해 손을 뻗었다. 황홀경에 빠질 즈음 갑자기 짠물을 빨아들인 콧구멍이 매웠다. 그 순간 모든 것이 부서졌다. 잿빛 물거품이 격렬하게 솟구쳐 휘몰아쳤고, 돌연 검은 그림자가 해를 가리며 유리병을 먹어 치웠다. 빛 한점 반사되지 않았다. 혼미해지는 찰나 조그만 몸체는 강력한 힘에 끌어 올려졌다. 그렇게 묘가 아진이 구(九)가 아진이 되었다. 아홉 개의 목숨을 가진 아이. 완성의 수, 나인. 위기에서 빠져나가는 능력이었다. 2 9살 아진은 정원 담벼락에 몸을 기대고 바다 구경하기를 즐겼다. 아버지의 거대한 검정 쌍원경을 들고 있노라면 아진은 콜럼버스였다. 왼쪽에는 돌산 섬을 잇는 A자형 빨강 대교가 웅장한 모습을 반쯤 드러내고, 정면에는 널따란 어항단지와 공원이 펼쳐졌다. 대교를 건너는 자동차들이 바로 눈앞에 있는 듯 생생했다. 날씨에 따라 시시각각 변하는 하늘과 구름, 산의 능선, 동네 풍광도 한눈에 담을 수 있었다. 주말이면 식구들과 외식 후 공원을 산책하며 거북선을 체험하곤 했는데, 어린 동생들은 거북선 앞에 있던 당나귀 타는 것에 더 관심을 가졌다. 운이 아주 좋은 날에는 파일럿 아버지를 따라 항구에 나갔다. 어마어마한 외항선의 선실과 갑판을 구경했다. 선박들이 정박하고 있는 부두에서 바라본 바다 너머 세상은 그야말로 미지의 세계였다. 아진은 아버지가 일본에 다녀오시는 길에 사 온 영국 귀부인 얼굴이 새겨진 초콜릿 상자 선물을 좋아했다. 아버지는 아내 유정심 씨가 뜨개질해준 크림색 목폴라 스웨터에 베이지색의 더블 트렌치코트를 입고 출항해서 보름이나 한 달 만에 돌아왔다. 가끔 아버지는 수산대학교 박물관에 아이들을 데리고 갔다. 어두운 복도를 따라 미로처럼 쭉 이어진 표본실에는 희귀한 해양생물과 바닷물고기 도감들이 가득했고, 보고자료와 문서들이 유리관에 반듯하게 진열되어 있었다. 길이 5미터나 되는 붉은 등지느러미의 은빛 산갈치는 괴물처럼 길어도 너무 길었다. 4,000m 깊은 바다를 드나드는 귀신고기는 날카로운 긴 이빨과 온몸의 가시로 괴기스러움을 제대로 뿜어냈다. 인적 드문 대학 박물관 표본실은 어둡고 냉기가 가득해 으스스했다. 아진은 꾹 참고 호기롭게 유리 안의 심해어를 빤히 쳐다봤다. 하지만, 방금이라도 살아 헤엄쳐 나올 기세에 곧 등골이 오싹해졌다. 아진은 동생들과 도망쳐 나오듯 뛰쳐나왔다. 그때부터일까. 아진은 깊고 어두운 바다는 무서웠다. 떠올리기만 해도 머리카락이 쭈뼛 서는 기분이었다. 하지만, 바다에 빠진 첫 번째 사건 이후로도 이제껏 바다에 대한 사랑은 변함없었다. 언제나 따뜻하고 밝은 남쪽 바다를 그리고 싶었다. 바다는 아진에게 어떤 위협도 준 적이 없었다. 평화로운 대자연이었다. 바다거북, 가오리, 문어, 오징어, 형형색색의 바닷물고기, 갈치, 고래, 상어, 미역, 산호, 해파리, 바위 위의 이끼도 잊지 않고 색칠했다. 그려도 그려도 질리지 않았다. 파랑은 항상 빨리 닳아 가장 짤막했고 어린 아진은 그게 그렇게 뿌듯할 수가 없었다. 다음 편에 계속-